익숙해진 저점에 대해
나는 한동안 버틸 수 있는 상태를
괜찮은 상태라고 여기며 살아온 것 같다.
조금 피곤하고,
조금 무겁고,
조금 탁한 상태여도 움직일 수만 있으면 그냥 이 정도면 괜찮다고 넘겼다.
아주 좋지는 않아도, 크게 문제 있는 것도 아니라고 여겼다.
그렇게 지내는 일이 길어지다 보니,
어느새 그 상태 자체가 내 기준이 된 것 같다.
그래서 몸 관리를 위한 치료를 받으며 어느 정도 컨디션이 올라왔다고 느끼는 와중에도, “이것보다 더 좋은 컨디션이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 말이 생각보다 오래 남았다.
내가 괜찮다고 믿고 있던 상태가 사실은 오래 적응해버린 저점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안 괜찮은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사람은 그걸 그냥 자기 기본값처럼 받아들이게 되기도 하는구나 싶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자주 그런 식이었다.
조금 무리가 쌓여도,
조금 지쳐도,
일단 움직일 수 있으면 계속 앞으로 가려 했다.
그때그때 할 일을 해내는 데에는 익숙했지만, 정작 내 상태를 정확히 읽는 데에는 둔했던 것 같다.
괜찮아서 버틴 것이 아니라, 버틸 수 있으니 괜찮다고 여긴 셈이다.
겉으로 보면 그건 성실함처럼 보일 수도 있다.
책임감처럼 보일 수도 있고, 생활력을 가진 태도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자기 감각을 놓친 채 계속 자신을 밀어붙이는 방식이 함께 섞여 있었는지도 모른다. 버티는 힘이 있다는 사실이, 정말 괜찮다는 뜻은 아닌데도 말이다.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나는 한동안 어떤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특유의 여유를 선뜻 믿지 못했다. 내 쪽의 기본값은 늘 어느 정도 무겁고, 어느 정도 버텨야 하는 상태에 가까웠기 때문에, 그보다 가볍고 정돈되어 보이는 태도는 처음엔 낯설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이 전적으로 내 오해였다고만 말하기도 어렵다.
돌이켜보면 내가 만난 많은 여유는 실제 안정감이라기보다, 여유로워 보이려는 태도에 더 가까웠던 것 같기도 하다. 감정의 동요나 소모를 겉으로 덜 드러내는 것과, 실제로 자기 상태를 건강하게 다루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인데, 나는 한동안 그 둘이 뒤섞인 장면들을 더 많이 봐왔다.
게다가 일터에서는 이상할 만큼 지쳐 보이는 상태가 성실함처럼 읽힐 때가 있다.
여유가 있어 보이면 오히려 덜 절박한 사람처럼 보이고, 어느 정도 소모된 기색이 있어야 비로소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분위기도 있다. 그런 환경에서는 건강한 여유보다, 여유를 감추거나 피로를 몸에 걸치고 있는 쪽이 더 안전한 태도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오랫동안 여유를 쉽게 신뢰하지 못했다.
그것은 내가 익숙한 기준점이 낮았기 때문이기도 했고, 실제로 건강한 여유보다 여유로운 척에 가까운 태도를 더 자주 봐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니 내가 여유를 위선이나 거리감, 혹은 진정성 없음 쪽으로 읽었던 데에도 나름의 현실적 이유는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여유를 같은 방식으로 판단할 수는 없다는 것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분명 소수였지만, 자기 상태를 덜 해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다른 종류의 여유도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매끈한 인상이 아니라, 자기 상태를 무너뜨리지 않으면서도 책임을 피하지 않는 태도에 가까웠다.
쉬어야 할 때 쉬고, 자기 상태를 살피는 일을 유난이나 사치처럼 여기지 않으며, 버티는 힘만으로 삶 전체를 끌고 가지 않는 감각. 어쩌면 내가 뒤늦게 알아본 것은 바로 그런 종류의 여유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제는 여유를 무조건 겉치레로만 읽지도 않고,
무조건 성숙함으로 포장하지도 않으려고 한다.
대신 그 여유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를 더 오래 보려 한다. 편안해 보여도 책임을 지는가. 부드럽게 말하면서도 행동이 따라오는가. 자기 상태를 돌보면서도 남에게 비용을 전가하지 않는가. 결국 판단해야 하는 것은 분위기가 아니라 반복되는 태도와 결과일 것이다.
익숙하다는 이유만으로 정상이라고 여기지 않기.
움직일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회복됐다고 착각하지 않기.
그리고 여유를 볼 때도,
그 겉모습이 아니라 그것이 책임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기.
오래 머물렀다고 해서 그곳이 제자리는 아닐 수 있으니까.